我國十八賢-16.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 - 1689)

by jjhyanggyo posted Mar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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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國十八賢-16.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1607 - 1689)

 

 

서벽배향(西壁配享) 제8위(第八位)

 

 

문묘배향인물.jpg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이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후에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배웠다.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하였고, 이로 인해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인종 13년(1635)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그는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춘추대의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여 효종과 의지를 일치시키기도 했으며, 효종으로부터 북벌의 밀지를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청의 압력으로 물러난 뒤, 충주목사,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9년(1658)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의 급서와 조대비의 복제 문제 등으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현종 9년(1668) 에 우의정에, 1673년에 좌의정에 잠시 임명되기도 하지만 곧 사퇴하고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비록 재야에는 있었지만 그는 조정의 공론을 좌지우지 하였고 대신들도 매사를 그의 의견을 물어야 할 정도로 사람의 중망과 함께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현종 15년(1674) 효종비의 상으로 인해 일어난 2차 예송에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덕원, 장기 등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숙종 9년(1683)에 사직하고 괴산의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숙종 15년(1689) 세자책봉은 시기상조라고 상소하였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시열은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당대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암은 일생동안 주자를 연구하였으며, 또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평해진다. 또한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존왕양이에 따른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일생을 '명의(名義)' 두 글자를 위해 살다간 인물로 평해진다. 그는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적용을 중시하여, 현실 개혁책으로 군제변통(軍制變通)과 공안개정(貢案改正), 서얼허통(庶孼許通), 사창제(社倉制)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권상하, 김창협, 이단하, 송상민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특히 권상하의 문인으로 한원진, 이간 등을 배출함으로써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함은 물론, 그의 학맥은 조선말기의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우암은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신원 되었으며, 다음해에 문정이라 추시되었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조 32년(1756)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송준길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대로사(大老祠),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 매곡서원, 초강서원 등 전국의 수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정서분류(程書分類)』 『송자대전(宋子大全)』(215권 102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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