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門十哲-3 설공 염옹(薛公 冉雍, BC 522 - ?)
東무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중궁이며 공자보다 2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매우 한미(寒微)하였으며 염백우( 冉伯牛) 염유( 冉有)와 동종(同宗)이다. 일찍이 공자를 스승으로 따르면서 열국을 주유하였으나 사적이 분명하지 않다.
『논어』에 의하면 염옹의 사람됨은 인독돈후(仁篤敦厚) 침정과언(沈靜寡言)하였으며, 국량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 [옹야]에서 공자가 "중궁은 군왕의 자리에 앉을 만하다(雍也可使南面)" 고 한 것은 중궁의 마음이 넓고 크며 간략하고 중후하여 인군(人君)의 도량이 있음을 찬상(讚賞)한 것이다. 또 『논어』 [공야장]에는 어떤 사람이 염옹에 대해서 "인(仁)하나 말재주가 없습니다.<仁而不 佞>"라고하자 공자는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이는 공자가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진 것을 감안할 때 크게 칭찬한 것이다.
『논어』 [안연]에서 중궁(仲弓)이 인을 물으니 공자는 "문을 나갔을 때는 큰 손님을 뵌 듯 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드는 듯이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안에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라고하자 염옹은 "제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이 말씀을 종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함께 공자가 제자들을 평하면서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 冉伯牛)에 이어 중궁을 언급하여 그가 덕행으로 뛰어난 제자임을 밝혔다.
그는 또 정치적 문제에 탁월한 견해를 가졌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논어』 [옹야]에서 염옹은 "자신이 경에 처하면서 간략함을 행한다<居敬而行簡>"라는 말을 하자 공자는 "옹(雍)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는 벼슬을 하는 자는 정책을 연구함에는 아주 신중히 그리고 진실하게 하여야 하지만. 그것을 실행할 때는 간단한 형식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염옹의 정치적 소신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 역대조정에서는 염옹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동한(東漢) 명제 영평 15년(72)에는 '공문십철'에 열입시켰다. 27년(739)에는 설후(薛侯)로 추증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는 천하비공(天下 邳公)으로 가봉되었고 도종 함순 3년(1267)에 설공(薛公)으로 개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