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4.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1544 - 1592)

by jjhyanggyo posted Mar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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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國十八賢-14. 문렬공 조헌(文烈公 趙憲, 1544 - 1592)

 

서벽배향(西壁配享) 제7위(第七位)

 
 

문묘배향인물.jpg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도원, 후율, 본관은 백천이다.

 

집이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하였고, 어려서부터 매우 효성스러웠다.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2년 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1년(1568)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 파주목, 홍주목 등의 교수를 역임하여 사품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선조 8년(1575)부터 호조좌랑, 예조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의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조헌은 언론이 과감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자주 임금의 노여움을 샀으며, 이로 인해 파직되기도 했다. 선조 5년(1572) 이후 교서관의 정자, 저작, 박사를 지내면서 불사봉향(佛寺封香)을 반대하는 글을 올려 임금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또한 동왕 20년(1587)에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동인의 영수 이산해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을 진노하게 했다. 동왕 22년에는 지부상소(持斧上訴)를 하여 동인의 전횡과 시정의 폐단을 극론하다가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길주 영동역에 유배되었으며, 그 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동왕 24년(1591)에는 풍신수길이 사신을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道)' 운운하자, 옥주에서 상경, 지부상소를 올리며 3일간 대궐 밖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다시 왜의 사신이 오자 지부복궐소(持斧伏闕訴)를 올려 왜적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에 승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관군에 의해 의병이 강제 해산 당하자, 남은 700명의 군사로 왜병과 금산에서 전투중 전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조헌은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등과 함께 임진 4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의 생애로 미루어 보면, 절의가 매우 뛰어나서 도학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이물로 이이와 이지함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 중기 개혁론의 기수가 된다. 또한 후에 실학파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선조 7년(1574)에 명나라에 다녀와 올린 『동환봉사(東還封事)』에는 그의 개혁사상이 집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따를 것을 건의하면서, 시무에 급한 문제를 다룬 [팔조소]와 위정의 근본이 되는 문제를 다룬[십육조소]등이 실려 있다.

 


그의 학문은 실천궁행으로 주장을 삼고 거경에 힘써서 근독공부(謹獨工夫)를 꾸준히 하였다. 또한 천문 지리 등에 능통하였으며 경세의 대지가 있었다.

 


선조 37년(160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영조 10년(173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표충사, 문회서원, 우저서원, 상현서원 성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971년 금산의 순절지인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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