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7.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1606 - 1672)
동벽배향(東壁配享) 제9위(第九位)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이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하였고, 20세 때에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인조 2년(1624)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동왕 8년 세마(洗馬)에 제수된 뒤, 동몽교관, 예안현감, 형조좌랑, 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1649)하면서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통정대부에까지 이르러, 송시열과 함께 효정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결국 물러나게 된다. 효종 9년(1658)에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인해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의 삼년 설을 누르고 기년설을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이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다. 사후 현종 14년(167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이듬해의 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숙종 1년(1675) 관작을 삭탈 당했다가 숙종 6년(1680)에 갑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복직되었다.
송시열과는 동족, 동문이며 학문의 경향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대부분 의견이 일치되었으니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송시열이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으로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 비하여, 인품이 원만하고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 비교적 비판이 적었고 인간관계도 원만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또한 예학에도 밝았다. 일찍이 그의 스승인 김장생은 그가 동방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 한다. 문하에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송시열의 문하에도 같이 출입했으며, 송상민, 남구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숙종 7년 (1681)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조 32년(175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숭현서원, 충현서원, 봉암서원, 돈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語錄解)』와 『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