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15.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1574 - 1656)
동벽배향(東壁配享) 제8위(第八位)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부친은 문묘에 배향된 김장생이며, 모친은 창녕 조씨이다.
8세에 송상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었다. 18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광해군 2년(1610)에 헌릉창봉으로 제수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인조반정(1623) 이후 부여현감과 임리현령, 공조참의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보다는 부친 김장생과 함께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한 기간이 더 길었다. 효종 즉위년(1650)에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러나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더 있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리는 등 그의 덕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에 김상헌의 청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80세에 좌참찬이 되었고, 81세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김집은 부친에게서 예학을 전수 받아 이를 체계화시켰다. 그는 관혼상제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후 예학의 방향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예학은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삼고 있지만, 고례(古禮)를 보다 중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는 이이와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시열에게 전수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시켰다. 문인으로는 송시열 외에도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고종 20년(188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돈암서원, 봉암서원, 창주서원, 문정서원, 부산서원, 월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고례에 입각해 당시 상례의 불합리한 점을 지적한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외에도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 『의례문해속(儀禮問解續)』 등이 있다.